홍가신(洪可臣) 1541년(중종 36) ~ 1615년(광해군 7) > 화성의 예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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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예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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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신(洪可臣) 1541년(중종 36) ~ 1615년(광해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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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성예총 댓글 0건 조회 1,578회 작성일 : 1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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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때의  문신․문장가로서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  본관은  남양이며,  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  온(昷)의  아들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으로  일찍이  학문에  힘써  제자백가에  통달했으며,  시문과  필법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칭송을  받았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한  뒤  천거로  1571년  강능참봉(康陵參奉)이  되었고,  재행탁이(才行卓異)로  예빈시주부에  특진되었다.  이어  형조좌랑․지평을  거쳐  1584년(선조  17)  안산군수를  지냈다.  1588년(선조  21)  수원부사로  구황(救荒)에  공이  있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고,  이듬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  때는  평소  그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1593년(선조  26)  파주목사로  등용되었다.  이듬해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부임하여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민병을  규합하여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과  함께  난을  평정하였다.  1600년  해주목사,  1602년(선조  35)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이어  판결사․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한성부우윤․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했고,  1610년(광해군  2)  형조판서에  이르러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아산(牙山)에서  죽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저서로는  『만전집(晩全集)』,『만전당만록(晩全堂漫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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