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용(洪思容, 1900~1947) 노작(露雀)이라는 호로 잘 알려진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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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성예총 댓글 0건 조회 1,871회 작성일 : 15-02-26본문
홍사용(洪思容, 1900~1947)
노작(露雀)이라는 호로 잘 알려진 작가이다. 1900년 5월 17일(음)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아버지 대한제국 육군헌병부위(副尉) 남양홍씨 철유(哲裕)와 어머니
능성 구씨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던 해 아버지가 무관학교에 합격하여 서울
재동으로 이사하였다. 8살 때인 1907년 군대해산으로 아버지와 함께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
492번지로 낙향하였다. 이듬 해 돌아가신 백부 승유(升裕, 1881년 사망)의 양자로 입적하
였고, 1912년 13세 때 2년 연상의 원주 원씨 효순(孝順)과 결혼하였다.
1916년 서울 휘문의숙에 입학하여 서울 의주로에서 하숙을 하였다. 1918해 월탄 박종화,
정백(鄭栢)과 유인물 「피는 꽃」을 펴냈다. 1919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1
운동에 참가하여 일경에 피검되었고, 6월 석우리로 낙향하여 정백과 고향에서 수필 「청산
백운(靑山白雲)」을 쓰기도 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 1920년 박종화 등과 문예지 『문우(文友)』을 창간하였고, 1922년 박
종화, 현진건, 박영희 등과 동인지 『백조(白潮)』를 창간하였다. 주로 홍사용이 자금을
대어 4.6배판 150여 페이지 규모로 1923년 5월까지 통권 3호를 발간하였다. 2호까지는 감
상과 치기(稚氣)에 젖은 소녀적 낭만주의가 지배적이었으며 3호에서는 이를 극복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홍사용은 『백조』 창간호에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발표한 이래 향토적인
소재를 감상적인 가락에 실어서 노래했다. 일제의 압박으로 소외된 민중의 슬픔을 노래한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3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한편 1923년 연극 단체인 ‘토월회(土月會)’의 동인으로 신극 운동에도 참여하여 이기세
․김영보 등과 함께 습작 희곡을 썼다. 1927년에 박진과 함께 극단 ‘산유화회(山有花會)’
를 조직하여 자작의 희곡 「향토심」을 공연했으며, 1928년에는 극단 ‘화조회’를, 1930년
에는 최승일․홍해성(洪海星)등과 ‘신흥극장(新興劇場)’을 만들었다.
문학과 예술을 위하여 천석지기 전답을 팔아 지원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강압과 민족말살정
책에 타협하기 싫어 1939년 절필하고 방랑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인 19147년 폐결핵으로 죽
었다. 유택은 화성시 동탄면 석우리 먹실 불당골에 있다.
주요작품으로 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봄은 가더이다」, 「꿈이면은」,
소설 「저승길」, 「봉화가 켜질 때」, 「귀향」, 「뺑덕이네」, 희곡 「할미꽃」, 「흰젓」
등이 있다.
홍사용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역 문화계 인사들에 의해 1984년 시비(詩碑)가 묘소
옆에 건립되었다. 2000년 6월 노작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가 개최된 이후 노작 홍사용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노작문학상 운영위원회가 2002년부터 노작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노작(露雀)이라는 호로 잘 알려진 작가이다. 1900년 5월 17일(음)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아버지 대한제국 육군헌병부위(副尉) 남양홍씨 철유(哲裕)와 어머니
능성 구씨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던 해 아버지가 무관학교에 합격하여 서울
재동으로 이사하였다. 8살 때인 1907년 군대해산으로 아버지와 함께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
492번지로 낙향하였다. 이듬 해 돌아가신 백부 승유(升裕, 1881년 사망)의 양자로 입적하
였고, 1912년 13세 때 2년 연상의 원주 원씨 효순(孝順)과 결혼하였다.
1916년 서울 휘문의숙에 입학하여 서울 의주로에서 하숙을 하였다. 1918해 월탄 박종화,
정백(鄭栢)과 유인물 「피는 꽃」을 펴냈다. 1919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1
운동에 참가하여 일경에 피검되었고, 6월 석우리로 낙향하여 정백과 고향에서 수필 「청산
백운(靑山白雲)」을 쓰기도 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 1920년 박종화 등과 문예지 『문우(文友)』을 창간하였고, 1922년 박
종화, 현진건, 박영희 등과 동인지 『백조(白潮)』를 창간하였다. 주로 홍사용이 자금을
대어 4.6배판 150여 페이지 규모로 1923년 5월까지 통권 3호를 발간하였다. 2호까지는 감
상과 치기(稚氣)에 젖은 소녀적 낭만주의가 지배적이었으며 3호에서는 이를 극복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홍사용은 『백조』 창간호에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발표한 이래 향토적인
소재를 감상적인 가락에 실어서 노래했다. 일제의 압박으로 소외된 민중의 슬픔을 노래한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3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한편 1923년 연극 단체인 ‘토월회(土月會)’의 동인으로 신극 운동에도 참여하여 이기세
․김영보 등과 함께 습작 희곡을 썼다. 1927년에 박진과 함께 극단 ‘산유화회(山有花會)’
를 조직하여 자작의 희곡 「향토심」을 공연했으며, 1928년에는 극단 ‘화조회’를, 1930년
에는 최승일․홍해성(洪海星)등과 ‘신흥극장(新興劇場)’을 만들었다.
문학과 예술을 위하여 천석지기 전답을 팔아 지원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강압과 민족말살정
책에 타협하기 싫어 1939년 절필하고 방랑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인 19147년 폐결핵으로 죽
었다. 유택은 화성시 동탄면 석우리 먹실 불당골에 있다.
주요작품으로 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봄은 가더이다」, 「꿈이면은」,
소설 「저승길」, 「봉화가 켜질 때」, 「귀향」, 「뺑덕이네」, 희곡 「할미꽃」, 「흰젓」
등이 있다.
홍사용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역 문화계 인사들에 의해 1984년 시비(詩碑)가 묘소
옆에 건립되었다. 2000년 6월 노작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가 개최된 이후 노작 홍사용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노작문학상 운영위원회가 2002년부터 노작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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