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대(崔成大) 1691년(숙종 17) ~ 1761년(영조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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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성예총 댓글 0건 조회 1,678회 작성일 : 15-02-26본문
조선 영조 때의 대시인이자 문신으로, 수원부 남곡면(南谷面, 현 화성시 정남면) 출신이다. 자는 사집(士集), 호는 두기(杜機), 본관은 전주이다.
1732년(영조8)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지평․장령 등을 역임한 뒤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시문에 뛰어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이후의 당대 제1인자로 불릴 만큼 조선후기 한시단(漢詩壇)의 대표적 시인이라는 명성이 있었다. 그는 향리와 안산지역을 오가면서 교우와 시작(詩作)을 영위하면서 ‘안산 15학사’가 형성 활동할 수 있는 문학적인 터전과 분위기를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시집 『두기시집(杜機詩集)』, 『두기시집속집(續集)』 등이 있다. 특히 5권 3책의 『두기시집』 본집은 그의 외생질(外甥姪)의 청으로 시인 자신이 고른 10편을 비롯하여 속편․보편․십편을 모두 합하여 1741년(영조 17)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것이다. 이 책의 권두에는 1741년에 당대의 탁월한 시인이자 문장가인 신유한(申維翰, 호 靑泉)이 지은 서문과 이수봉(李壽鳳)의 서문이 있다. 이 시집은 권1 선십편(選十編) 시 357수, 권2 속5편 시 112수, 권3 보편상(補編上) 8편 172수의 시, 권4 보편하(補編下) 9편의 시 170수, 권5 십편(拾編)으로 4편에 161수의 시 등 모두 800여 편의 주옥같은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그의 시는 감상을 내포하는 가운데 사실성이 뛰어났다는 평을 듣는다.
1732년(영조8)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지평․장령 등을 역임한 뒤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시문에 뛰어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이후의 당대 제1인자로 불릴 만큼 조선후기 한시단(漢詩壇)의 대표적 시인이라는 명성이 있었다. 그는 향리와 안산지역을 오가면서 교우와 시작(詩作)을 영위하면서 ‘안산 15학사’가 형성 활동할 수 있는 문학적인 터전과 분위기를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시집 『두기시집(杜機詩集)』, 『두기시집속집(續集)』 등이 있다. 특히 5권 3책의 『두기시집』 본집은 그의 외생질(外甥姪)의 청으로 시인 자신이 고른 10편을 비롯하여 속편․보편․십편을 모두 합하여 1741년(영조 17)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것이다. 이 책의 권두에는 1741년에 당대의 탁월한 시인이자 문장가인 신유한(申維翰, 호 靑泉)이 지은 서문과 이수봉(李壽鳳)의 서문이 있다. 이 시집은 권1 선십편(選十編) 시 357수, 권2 속5편 시 112수, 권3 보편상(補編上) 8편 172수의 시, 권4 보편하(補編下) 9편의 시 170수, 권5 십편(拾編)으로 4편에 161수의 시 등 모두 800여 편의 주옥같은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그의 시는 감상을 내포하는 가운데 사실성이 뛰어났다는 평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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