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兪棨) 1607년(선조 40) ~ 1664년(현종 5) > 화성의 예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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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예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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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계(兪棨) 1607년(선조 40) ~ 1664년(현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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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성예총 댓글 0건 조회 1,637회 작성일 : 1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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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효종  때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수원부  서촌(西村)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호조판서  강(絳)의  고손,  참봉  증(曾)의  아들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한  뒤  1633(인조  1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승문원  겸  마승(承文院兼馬丞)을  거쳐  1636년  시강원설서로서  세자  교육의  중책을  맡았을  때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그는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했을  때  김유(金瑬)․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  대신을  처단하고  청군과  항쟁할  것을  주장하는  등  연소한  나이에  척화파(斥和派)의  맹장(猛將)으로  활약하였다.  청과의  화의가  성립되자  주화파대신들은  척화파  인사들을  부박(浮薄)하게  나라를  그르친  죄인으로  규정,  척화죄로  이듬해  충청도  임천으로  유배되니  그때  나이  31세였다.  1639년  3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난  뒤  벼슬을  단념하고  1641년(인조  19)  가족을  모두  이끌고  호남의  금산(錦山)으로  이사하였다.
일생을  청빈하게  지냈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인  1664년  2월  집이  너무  가난하여  약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우황(牛黃)  1부를  하사했다고  한다.  말년에  정치가로서  내수(內修)․안민(安民)정책을  추구,  백성의  부담이  가중되고  국가재정에  큰  압박  요인이  되는  군비  확장정책을  반대하였다.  행정가로서보다는  학자․이론가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우당(友黨)인  서인측으로부터는  진보적인  변통론자(變通論者)로서  인정받았고,  반대당인  허목  등  남인으로부터도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성리학자로서  박람강기(博覽强記)하고  논설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특히  스승인  김장생의  학통을  이어받아  예론(禮論)에  정통했고,  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학문적  관심은  매우  넓어서  이이와  성혼,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벌어진  이기논쟁(理氣論爭)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가졌으며,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음양(陰陽)․이수(理數)․역학(易學)에  대해서도  깊은  조예를  지녔다.  임천의  칠산서원(七山書院)․무안(務安)의  송림서원(松林書院)․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좌찬성에  추중되었다.  저서로는  『시남집(市南集)』,『가례원류』,『여사제강』,『강거문답(江居問答)』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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