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팔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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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성예총 댓글 0건 조회 1,801회 작성일 : 15-02-26본문
정팔봉(1907~1969)
정팔봉은 화성군 매송면 금곡리에서 정순명의 이남으로 태어났다. 악기로는 대금을 했고 삼현과 시나위도 하였다고 하며 사승 관계는 밝혀진 바가 없다. 이를 증언을 해 줄만한 이도 현재는 없으며 기록된 것조차도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인데 필자가 경기도의 원로 국악인들이 생존할 당시에 문의를 했으나 모두 모른다는 답변이었다. 대금 가락은 같이 굿판에서 굿을 해 본 이들의 말을 따르면 마치 “구름 위에 뜬 것처럼 한유하고 신선이 나는 것처럼” 연주를 한 것으로 보아 가히 어느 누구보다도 재주가 빼어난 이었다고 하며 팔봉의 선대에도 분명하게 국악을 했을 이지만 이를 증언을 해 줄 이가 없다. 또한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매송면사무소에 불을 놓아서 일체의 서류가 타버려 1954년 호적부를 재작성하는 바람에 선대의 가계를 알 수가 없다. 정팔봉에 대한 기록은 문화재관리국(현․문화재청)에서 낸 무형문화재 조사 보고서 <시나위> 편에 그 이름이 나오지만 이름 석 자만 나오고 구체적인 사승 관계 등은 나와 있지 않다.
정팔봉은 화성군 매송면 금곡리에서 정순명의 이남으로 태어났다. 악기로는 대금을 했고 삼현과 시나위도 하였다고 하며 사승 관계는 밝혀진 바가 없다. 이를 증언을 해 줄만한 이도 현재는 없으며 기록된 것조차도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인데 필자가 경기도의 원로 국악인들이 생존할 당시에 문의를 했으나 모두 모른다는 답변이었다. 대금 가락은 같이 굿판에서 굿을 해 본 이들의 말을 따르면 마치 “구름 위에 뜬 것처럼 한유하고 신선이 나는 것처럼” 연주를 한 것으로 보아 가히 어느 누구보다도 재주가 빼어난 이었다고 하며 팔봉의 선대에도 분명하게 국악을 했을 이지만 이를 증언을 해 줄 이가 없다. 또한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매송면사무소에 불을 놓아서 일체의 서류가 타버려 1954년 호적부를 재작성하는 바람에 선대의 가계를 알 수가 없다. 정팔봉에 대한 기록은 문화재관리국(현․문화재청)에서 낸 무형문화재 조사 보고서 <시나위> 편에 그 이름이 나오지만 이름 석 자만 나오고 구체적인 사승 관계 등은 나와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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