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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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성예총 댓글 0건 조회 1,918회 작성일 : 15-02-26본문
장만용(?~1908)
표-5. 장만용의 가계도
①장만용─┬─문씨
├──────────────┐
②점학(점보)─┬─김씨 ⑦흥봉(성순)─┬─이씨
┌──┬─┴─┬──┐ ┌──┬─┴──┬──┐
③유성 ④희성 ⑤철지 ⑥인성 ⑧유남 ⑨유순 ⑩유석 ⑪유진
①장만용(?~1908)은 피리, 해금을 한 이라고 하며 충남 아산 신창리에 나서 데릴 사위로 들어 간 집이 마침 무업에 종사한 집안으로서 이 집안에서 살다가 장씨 집안에서 반대가 심해서 결국 이 동네에서 못 살고 경기도 수원시 매탄동(현 수원시 매탄동) 산드래미로 이사해 와서 살다가 일가를 이루어 이 자손들도 무업에 종사 하게 되었다. 호적에는 수원군 음덕면 송림리로 기록이 되어 있다. 장만용이 처가에서 무슨 학습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며 그 자손들이 선학습을 한 이가 없는 것을 보아서 장만용도 처가에서 악사로 종사하지 않았나 추측을 할 따름이고 사승 관계 역시 밝혀진 바가 없다.
②장점학(1871~1928)은 장만용의 장남이며 일명 점보라고도 한다. 해금과 땅재주의 명인 김봉업(1881~1962)과는 처남매부지간이며 해금과 대금을 한 이이고 발탈과 한국 전통 춤을 잘 춘 고 이동안(1906~1995)을 제자로 두었으나 이동안은 젊은 나이에는 대금을 가지고서 이 일에 전적으로 종사를 하지는 않고 가끔 풍류를 할 적에는 연주를 하곤 하였다한다. 김봉업과 처남매부지간이라면 이에게 학습을 했을 터이지만 배웠다는 근거는 없다. 아마도 김봉업이 해금에 명인이니만큼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 김봉업은 임흥준한테 해금을 배웠다고 장사훈은 기록을 했는데 흥준은 수원의 학습꾼 학준과는 형제지간이고 학준은 일제시대에 서울에 와서 경성 방송국에 출연을 하기도 하였으며 오랫동안 활동 하지는 않은 것 같다.
③장유성(1907~1966)은 피리와 해금을 하였으며 숙부인 성순한테 배웠다고 한다.
④장희성(1914~197?)은 성순한테 해금을 배웠고 성순의 제자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재주를 지녔었다고 하며 활대를 많이 긋지 않으면서도 한번 “잉어질” 하면 별별 가락이 다 나왔을 정도로 재주가 좋았다고 한다. 희성은 제자는 안 두었으며 장인은 평택에서 살다가 원산에서 소리 선생을 하다 생을 마감한 박만식(일명;장순)이고 판패개 소리를 잘 하였다고 한다.
⑤장철지(1911~?)는 점보의 딸로서 무업에 종사를 했으며 안산이나 시흥 등지에서는 김부전(일명․복동) 등과 이름을 날린 명무였다고 한다.
⑦장성순(1889~1941)의 호적명은 흥봉이며 말년에 성순이라고 개명을 하였으며 해금, 장고에 능하였고 경기도 남부 지방의 해금 악사들은 거의 성순한테 학습을 했을 정도로 유명한 이었으며 부친인 만용한테 학습을 하였다고 한다.
⑧장유남(1914~19?)은 피리, 해금을 하였고 장성순에게 학습을 하였다.
⑨장유순(1917~1963)은 피리 삼현과 시나위에 능했으며 피리 시나위와 삼현은 사강에서 살았다가 말년에 서울에서 활동한 김복진(? ~ ?)에게 일주일 만에 피리 시나위와 삼현을 배우고 다시 화성군 이물리에 살았던 방씨 성을 가진 이에게 다시 시나위와 삼현을 그 집에 숙식을 하면서 삼개월 동안 김복진에게 없는 가락과 나머지 부분을 배웠다. 유순의 제자로는 방인근(1942~2001)이 있는데 피리, 삼현과 시나위를 이어 받았다. 유순의 피리 가락은 오필순의 가락이 한유하고 수성질을 별로 하지 않는 대신 유순의 가락은 수성질을 하면서도 “도드라진” 가락이 돋보였다고 하며 “피리 서”가 다른 이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두꺼워서 그 “피리 서” 가지고서는 다른 이들은 “김”조차 낼 수 없을 정도이어서 피리 가락이 옹골차고 대마디 대쪽 같은 가락이 나와 다른 악사들이 흉내를 못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피리 시나위는 유순과 오필순과 겨루면 우열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고 하며 대금 시나위는 오필순, 이용우, 정팔봉, 문상근이 어깨를 겨루었다고 하며 해금 시나위는 장희성과 임선문이 겨루었고 선학습 판패개 학습은 오필순과 이용우, 이덕만, 하대봉, 이장관, 김종완, 김창화, 지갑성, 정명환, 이충옥, 박장식, 하덕립, 하덕오, 하영운 등이 겨루었고 또한 유순은 국제 방송이 수원에 있을 적에 해외 교포들을 위해서 방송을 하였을 적에 정팔봉(대금), 장유순(피리), 오필순(해금, 피리), 이장관(장고) 등이 생방송을 했다고 한다. 이용우, 오필순, 이동안, 방인근 등과 1960년대 창궐한 여성 국극단이나 창극단에 참가를 하여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한다.
표-5. 장만용의 가계도
①장만용─┬─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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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점학(점보)─┬─김씨 ⑦흥봉(성순)─┬─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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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유성 ④희성 ⑤철지 ⑥인성 ⑧유남 ⑨유순 ⑩유석 ⑪유진
①장만용(?~1908)은 피리, 해금을 한 이라고 하며 충남 아산 신창리에 나서 데릴 사위로 들어 간 집이 마침 무업에 종사한 집안으로서 이 집안에서 살다가 장씨 집안에서 반대가 심해서 결국 이 동네에서 못 살고 경기도 수원시 매탄동(현 수원시 매탄동) 산드래미로 이사해 와서 살다가 일가를 이루어 이 자손들도 무업에 종사 하게 되었다. 호적에는 수원군 음덕면 송림리로 기록이 되어 있다. 장만용이 처가에서 무슨 학습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며 그 자손들이 선학습을 한 이가 없는 것을 보아서 장만용도 처가에서 악사로 종사하지 않았나 추측을 할 따름이고 사승 관계 역시 밝혀진 바가 없다.
②장점학(1871~1928)은 장만용의 장남이며 일명 점보라고도 한다. 해금과 땅재주의 명인 김봉업(1881~1962)과는 처남매부지간이며 해금과 대금을 한 이이고 발탈과 한국 전통 춤을 잘 춘 고 이동안(1906~1995)을 제자로 두었으나 이동안은 젊은 나이에는 대금을 가지고서 이 일에 전적으로 종사를 하지는 않고 가끔 풍류를 할 적에는 연주를 하곤 하였다한다. 김봉업과 처남매부지간이라면 이에게 학습을 했을 터이지만 배웠다는 근거는 없다. 아마도 김봉업이 해금에 명인이니만큼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 김봉업은 임흥준한테 해금을 배웠다고 장사훈은 기록을 했는데 흥준은 수원의 학습꾼 학준과는 형제지간이고 학준은 일제시대에 서울에 와서 경성 방송국에 출연을 하기도 하였으며 오랫동안 활동 하지는 않은 것 같다.
③장유성(1907~1966)은 피리와 해금을 하였으며 숙부인 성순한테 배웠다고 한다.
④장희성(1914~197?)은 성순한테 해금을 배웠고 성순의 제자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재주를 지녔었다고 하며 활대를 많이 긋지 않으면서도 한번 “잉어질” 하면 별별 가락이 다 나왔을 정도로 재주가 좋았다고 한다. 희성은 제자는 안 두었으며 장인은 평택에서 살다가 원산에서 소리 선생을 하다 생을 마감한 박만식(일명;장순)이고 판패개 소리를 잘 하였다고 한다.
⑤장철지(1911~?)는 점보의 딸로서 무업에 종사를 했으며 안산이나 시흥 등지에서는 김부전(일명․복동) 등과 이름을 날린 명무였다고 한다.
⑦장성순(1889~1941)의 호적명은 흥봉이며 말년에 성순이라고 개명을 하였으며 해금, 장고에 능하였고 경기도 남부 지방의 해금 악사들은 거의 성순한테 학습을 했을 정도로 유명한 이었으며 부친인 만용한테 학습을 하였다고 한다.
⑧장유남(1914~19?)은 피리, 해금을 하였고 장성순에게 학습을 하였다.
⑨장유순(1917~1963)은 피리 삼현과 시나위에 능했으며 피리 시나위와 삼현은 사강에서 살았다가 말년에 서울에서 활동한 김복진(? ~ ?)에게 일주일 만에 피리 시나위와 삼현을 배우고 다시 화성군 이물리에 살았던 방씨 성을 가진 이에게 다시 시나위와 삼현을 그 집에 숙식을 하면서 삼개월 동안 김복진에게 없는 가락과 나머지 부분을 배웠다. 유순의 제자로는 방인근(1942~2001)이 있는데 피리, 삼현과 시나위를 이어 받았다. 유순의 피리 가락은 오필순의 가락이 한유하고 수성질을 별로 하지 않는 대신 유순의 가락은 수성질을 하면서도 “도드라진” 가락이 돋보였다고 하며 “피리 서”가 다른 이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두꺼워서 그 “피리 서” 가지고서는 다른 이들은 “김”조차 낼 수 없을 정도이어서 피리 가락이 옹골차고 대마디 대쪽 같은 가락이 나와 다른 악사들이 흉내를 못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피리 시나위는 유순과 오필순과 겨루면 우열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고 하며 대금 시나위는 오필순, 이용우, 정팔봉, 문상근이 어깨를 겨루었다고 하며 해금 시나위는 장희성과 임선문이 겨루었고 선학습 판패개 학습은 오필순과 이용우, 이덕만, 하대봉, 이장관, 김종완, 김창화, 지갑성, 정명환, 이충옥, 박장식, 하덕립, 하덕오, 하영운 등이 겨루었고 또한 유순은 국제 방송이 수원에 있을 적에 해외 교포들을 위해서 방송을 하였을 적에 정팔봉(대금), 장유순(피리), 오필순(해금, 피리), 이장관(장고) 등이 생방송을 했다고 한다. 이용우, 오필순, 이동안, 방인근 등과 1960년대 창궐한 여성 국극단이나 창극단에 참가를 하여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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