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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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성예총 댓글 0건 조회 2,230회 작성일 : 15-02-26본문
이용우(1899~1987)
이용우는 화성군 동탄면 송라리에서 이종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대는 오산읍 원리(오산시 원동)에서 무려 11대를 터를 잡고 살다가 부친대에서 송탄에서 부산리로 이사를 하여 살기도 하였다. 두루 알다시피 이용우는 이 시대의 마지막 선학습꾼으로 퍽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이인데 이용우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경기도 도당굿에서 볼 수 있는 멋있는 판패개 소리는 더는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용우에 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이 주목을 하였다. 그에 관해서는 문화재관리국의 무형 문화재 조사보고서에 보이는 이력서가 남아있다. 사승 관계 등 본격적으로 이용우에 대한 면모를 다룬 것은 1980년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나온 것과 제적부나 족보 등을 참고하고 또한 유가족이나 제자, 친소 관계있는 이들을 만나서 대담한 것을 바탕으로 이의 생애, 사승 관계, 활동 사항 등을 살펴 보려한다.
이용우의 학습 내력을 보면 아홉 살부터 서모(庶母)인 김해 출신 박금초에게 소리를 배웠다. 박금초는 부친 이종하 보다 두세 살 위라고 하며 판소리를 잘하였다고 하고 열세 살까지 협률사을 따라 다니기도 하며 공연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보형, “ 경기도 도당 굿 ”,『한국민속종합보고서- 무의식 편』, 문화재 관리국, 1983.
부친 이종하가 단체를 이끌고 다니면서 총무나 단체장을 역임하면서 십년을 다니기도 하다가 이 단체가 무슨 단체인지는 구체적으로 몰랐는데 최근에 필자는 <오산재인청> 이라는 소책자를 한국고음반연구회 회원인 배연형 선생한테서 얻을 수가 있었는데 이 소책자는 필사한 것으로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은 이용우 일가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그들의 무의식 입문 과정 등 경기도 산이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閔泳璇 협률회사 (광무 7년; 1903년 5월) 라는 기록이 보인다. 자료를 제공해 주신 배연형 선생께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부산의 초량동 공연시에 해산을 하고 말았다고 한다.
13세부터 15세까지는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을 익히고 이어서 소리목을 다듬기 위해서 부친의 말에 따라서 통도사에 가서 백일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한다. 이보형; 注 20) 참조
이때에 절에서 스님들한테 역학을 배우기도 하고 15세에는 구한말 법무대신 이근호 판사가 광무대를 창설할 당시에 불러서 20세까지 광무대, 단성사 극장에 가서 공연도 하고 멀리는 평양, 함경도까지 다니다가 오산으로 귀향하여 20살 때에 귀향을 하여 일 년간 농사를 짓다가 대금을 만 이년간 독공으로 배웠다한다. 장주근, 「무속」, 『한국민속종합보고서 - 경기도 편』, 문화재관리국, 1978.
장주근이 이용우에 대해서 학습 과정을 밝히기는 하였으나 자세한 내용이 없으며 더구나 전문적인 음악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술된 것이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보형이 그 뒤에 자세한 기록과 연구 논문이 있다.
그러나 이보형이 조사한 보고서에는 대금을 양감면 태생 김부억쇠에게 대풍류와 삼현 한바탕을 배운 바가 있다고 한다. 이보형, 「경기도 - 이용우 편」, 『삼현육각』, 국립 문화재연구소, 1982.
김부억쇠는 이종하와 연배가 비슷한 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1920년도 전후로 생존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되며 이것이 얼추 맞다면 이의 아들인 김기준은 양감면에서 나서 청궁면 용소리에서 살다가 세상을 뜬 김기준이 아닌가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직 알 수가 없다. 김기준은 1960년대 한창 여성 창극단이 창궐했을 적에 창극단에서 대금 반주를 많이 했다고 하며 나중에는 부지거처하다가 세상을 버렸다고 한다. 방인근 대담; 96년. 1월 31일 송파구 오금동 송파 국악 연구실에서. 故 방인근은 십대 후반부터 경기도 산이들과 굿판에서나 창극단에서 연주를 하여 본 녹녹잖은 피리 연주인이었는데 김기준(양감면, 대금), 김창규(천안생, 해금), 김영춘(아산생, 피리) 등 경기, 충남 지역 출신과도 많은 연주를 해 보아서 김기준에 대해서 증언을 해 주었으나 자세한 궤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시나위 학습은 따로 배우지는 않고 이녁이 스스로 가락을 다듬어서 하고 시나위 가락이 고정된 선율이 아니고 국악원 음악처럼 정해진 가락은 없지만 일정한 틀이 있는 것이라서 이것 역시 개개인마다 독특한 가락이 있는데 이에 대한 것은 선학의 연구가 있다.이보형, 「시나위 청」, 『한국음악연구』, 제8-9집 합병호, 한국국악학회, 1979. 32 - 34 쪽
또한 보부상들의 모임인 “하체돌림” 에도 나가서 삼현육각을 반주하기도 하고 이렇게 30세 무렵까지 활동을 하다가 대동 굿이나 집안에서 하는 집굿에도 가서 대금 연주나 판패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장주근, 앞의 注) 참조
또 다른 자료로 이종하(李鍾夏)는 을축생으로 재인청 도육방을 역임하였고 도당 굿의 “선학습꾼”으로 그 이름을 드날리었고 춤의 명인이었다고 하며 민영환(閔泳煥)의 도청직(都廳直)이었다고 한다.
박금초는 경상도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으로 임술생이며 이종하 보다 네 살이 위이며 이용우가 창극단을 따라 다닐 적에는 이동백, 한생전, 정봉민, 조양운 등이 수행했으며 12세에는 부산 草梁에서 해산했기 때문에 귀향을 해서 15세까지 한문과 통감 둘째 권까지 읽고 배웠다한다. 15세에는 서울 이근옥 판사가 장안사를 짓고 창극 단체를 조직하라는 기별이 있어서 경상도 양산 소재 통도사에 가서 백일 공부를 하기도 했다한다. 이보형, 「무의식- 수원 편」, 『한국민속종합보고서』, 문화재청, 1983. 이 기록은 장주근이 쓴 것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데 이보형의 기록은 좀 더 자세하다.
이 기록은 앞의 어느 기록보다도 비교적 정확하며 경기도의 세습 무의식과 민속 음악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왔기 때문에 좋은 기록이 나올 수가 있었다.
이용우가 활동한 시기는 크게 나누어서 일제 시기 초입에 협률사 시기와 귀향해서 대금 학습 시기와 소리 학습 시기, 해방 후에 창극단 시기이다. 창극단 시기는 삼성 국극단과 박보아 단체에서 대금 반주자로서 활동한 시기, 그리고 60년대 중반 무렵부터 70년도 중반까지 서울을 드나들면서 지갑성 일행들과 방송국에 취입한 시기, 70년대 중반부터 80년도 작고할 때까지로 나눌 수가 있다. 일제 시기 초입의 활동에서부터 귀향한 시기까지는 다루었으며 60년대부터 약간 다루어 보면 대강의 면모를 알 수가 있는데 그 당시의 창극단은 자고새면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거듭하다가 지금은 실낱같이 남았지만 이용우가 창극단을 다닐 적에는 이렇게 많은 단체가 생겨서 일일이 기억을 해내지 못했다고 하며 대충 기억을 해서 증언한 것을 보면 박보아, 옥진 자매가 만든 삼성 단체에도 다니고 박후성 단체에도 2년, 한일섭, 남연화 단체와도 다니고 그리고 임춘앵 단체와는 4년간을 다녔는데 단체 가운데 가장 많이 다닌 단체였다고 한다. 창극 단체를 다닐 적에는 소리는 안하고 대금 반주만 하였다고 한다. 장주근, 앞의 글 참조
같이 창극단을 다닌 이들 가운데에는 장유순(피리), 방인근(피리), 오필선(피리, 해금, 대금),이동안(춤), 조만봉(대금) 등이었다.
또한 예전에는 구한말의 세도가의 집이었지만 지금은 한국문화재보호협회가 만든 재단 낙성식에도 참가를 하여 도살풀이 춤 보유자였던 고 김숙자(안성생), 오수복(제98호 경기도 도당 굿 보유자), 고 오막음, 오귀례 등과 예의 꼿꼿한 성품만큼이나 성주풀이를 “그야말로 상중하청을 달아놓고 한바탕 판을 벌인” 적도 있었으며 오수복 대담; 1992. 12. 10. 수원시 권선구 매교동 114-20. 자택에서
지금의 국립극장이 시공관이라고 이름을 붙여 명례방(지금의 명동)에 있다가 남산 언저리에 안목 없는 이들에게 의해서 옮겨졌을 때에도 거기 가서도 군웅 춤을 추기도 하였다.
지갑성 일행과는 한국방송공사에 가서 집굿에서 쓰이는 무속 음악들을 녹음을 하기도 하고 이때에는 주로 이충선(피리), 지갑성(장고), 이용우(대금), 임선문(해금), 전태용(징)이 녹음한 음향 자료도 있으며 이들이 남긴 무속 음향 자료가 21세기로 들어 선 이즈음 이들이 남긴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대금에 김광식(광주생)이 있었으나 이미 1972년도에 세상을 떠버려서 녹음을 못 남겼고 또한 김광식은 주로 무대 공연이나 방송국에 다닌 관계로 이들과는 어울릴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중반에는 경기도에서 있는 도당굿에 참가하여 큰 거리인 손님굿, 군웅 굿, 뒷전에는 어김없이 유장한 사설과 송곳 같이 질르는 상청과 때로는 애원이 깃든 청승스런 목구성을 유감없이 발휘를 하였다.
화성군 반월면 이덕만이 있었지만 육십년대를 거쳐 칠십년대 초까지는 활발하게 활동을 했지만 칠십년도 중반 이후로는 별로 활동이 없어서 이덕만의 소리는 좀처럼 들을 기회가 없었다한다. 오수복 대담; 앞의 주) 참조
1980년대에는 이미 예전에 있었던 단골 제도도 겨우 유지하던 때이고 더구나 도당 굿은 더더욱 없어져 가는 시점이라서 어느 집이나 마을에서 초청을 하면 가서 대금 반주나 녹음을 간간이 해주는 정도였고 더러 오래된 단골집에서 옛 방식대로 굿을 하기도 하였다. 집에서는 경기도의 세습무들이 굿을 해줄 때처럼 판패개 소리도 하고 대금 반주도 하고 장고도 연주하기도 하다가 1987년도에 안타깝게 그 재주를 다하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버렸다.
제자로는 현 경기도 도당 굿 보유자 오수복(1925~ )이 있으며 군웅 춤, 제석 춤을 가르쳤고 한지에 붓으로 장단을 표시한 것을 보고 재학습을 한 고(故) 방인근이 있으며 그 이외는 뚜렷한 제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려 마지막 경기도 선학습꾼의 기가막힌 재주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울 다름이다.
다음은 이용우의 가계도인데 이 가운데에서 국악에 종사한 이도 있을 터이고 안한 이도 있을 터인데 이용우가 아는 이들의 이름과 실제 족보에 기록된 이들과는 이름이나 생몰 연대 또는 계보 순서나 출계, 직계, 방계가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적에 조금은 차이가 날 수가 있을 것이다.
표-4. 이용우의 가계도
①규인─┬─우씨
├──────────┬────────┐
②종하─┬─장씨 ③종만─┼─오씨 ④종문─┼─신씨
┌──┼───┐ ┌─┴─┐ │
⑦덕우 ⑥용우 ⑤흥우 ⑧철우 ⑨영우 ⑩춘길
배연형 소장 필사본 자료 <오산 재인청>과 이용우가 증언한 선대의 이름과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 것은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부득이한 사정임을 감안하기를 바란다. 배연형 소장 <오산 재인청> 에 기록된 이용우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용우→ 종하(부친대)→ 貴仁( 족보에는 奎仁이라고 표기 되어 있다) → 興達 →啓明→ 五福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흥달은 아마도 광달, 규달과 같이 <達>字가 한 行列字로 형제간이며 계명이라는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같은 “계” 字 항렬에선 나온 이인지 아니면 啓河라는 이와는 다른 인물임에는 분명한데 참고로 계명은 헌종대 사람이고 병인생이고 갑인년에 졸하였다고 기록이 있으며 字는 禧星이며 생부는 龍奎이고 형규한테 양자를 갔다고 나오며 이 계명이 맞다면 이종하가 소장하고 있었던 <巫鼓等牌韓自勤吉等狀>에 나오는 이계명과 동일 인물임이 틀림없다.
이종하가 소장하고 있었던 위 문서 중 <右謹言, 漁灘面松蘿里居李啓明卽矣等同類下賤也>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위의 계명과 일치한다. 추엽 융(최길성 역), 「무당의 사회 생활」, 『조선무속의 현지연구』, 계명대 출판부, 1987. 185 쪽.
그리고 이 족보는 이용우가 생전에 만든 것을 다시 종친회에서 개정 증보한 것이며 이용우의 조카딸이 소장을 하고 있다. 가승은 한국전쟁 때에 분실하고 족보만 남아 있다. 관향은 경주이며 상서공파이고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다.
먼저 이용우가 증언한 선대 계보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조부는 규인이며 증조부는 광달(光達) 이용우가 광달이라고 했으나 족보에는 <達榮>이라고 기재 되어 있다.
흔히 우리나라의 족보에는 실제 이름과 족보 표기에서 字, 初名 등이 다르게 기재 된 것을 감안한다면 이용우가 말한 광달은 초명이고 족보명은 달영이라고 보면 된다.
이며 증조부가 삼층 정자관을 쓰고서 촬영한 사진이 있었으며 진사 벼슬을 한 선대가 있어서 홍패 같은 문서들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분실하였고 판소리 명창 이동백의 통정대부라는 명예직도 부친인 종하가 만들어 준 것이다. 삼층 정자관을 쓴 광대는 증조부 밖에는 없다고 증언을 하였는데 흥미로운 것은 팔도 도대방은 대원군이 쥐고 있다가 증조부인 광달이 이어 받고 다시 조부인 규인으로 부친 종하로 이어 받았으며 일제시대에는 “팔도산이” 도조합장(都組合長)을 일본인이 했으며 숙부인 종만이 부조합장을 역임 했다고 한다.
그후에 충청도에서 대방청이 생겨 대방 밑에 부장(副長)격인 도산주(都山主)가 생겼다고 증언을 하였다. 장주근; 앞의 주) 참조
① 이규인(?~?)은 이용우의 조부이며 팔도 도대방을 역임을 했다고 한다. 이규인의 학습에 관해서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없는데 악사였는지 아니면 선학습꾼이었는지 밝혀진 바가 없으나 팔도 도대방을 역임을 하였다하는 것으로 보아서 악사나 선학습꾼이 분명하다. <오산십이차>의 굿 문서는 바로 이 “산이” 집안에서 전해 오기 때문이다. 생몰연대가 족보에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②이종하(1865~1939)는 이용우의 부친이며 이규인에 이어서 팔도 도대방을 역임했으며 도당 굿에서 선학습꾼이었다고 하며 또한 춤의 명인이었고 아들 이용우를 가르쳤다. 부인은 인동 장씨로 병인생이다. 일본제국주의 시절 일본인 추엽 융 일행이 와서 채록한 <오산십이차> 의 무가와 세습무들의 전반적인 자료를 제공한 이가 바로 종하 일가이다. 이종하의 작고한 시기가 불분명한 것은 족보에도 졸년(卒年)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은데 이용우의 제적부에는 한국전쟁 때에 오산읍이 인민군에 의해서 폭격을 당해서 일체의 서류가 불타서 작고한 연도를 알 수가 없으며 겨우 태어난 해를 안 것은 1954년에 다시 작성을 한 제적부와 족보를 통해서였다. 제2차 제보자인 손녀 딸 모모씨(1934~ )가 다섯 살에 이종하가 세상을 떴으니 1939년이라는 작고한 연대가 나온 것이다. 아들 이용우만이 유일하게 국악에 종사를 하고 다른 자손은 종사하지 않았다.
③이종만(1870~?)은 일명 춘만(春萬)이라고도 하며 팔도재인청 부조합장을 역임 하였고 형인 이종하처럼 학습을 한 이는 아니며 재인청에 관여만 하였다고 한다. 작고 연대 역시 족보에도 기록이 안 되어 있는데 이종하 보다는 이삼년 먼저 작고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1936경 쯤 작고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손 가운데 국악에 종한 이는 없다. 작고 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은 한국전쟁 때에 일체의 서류가 불탔기 때문이다.
④이종문(?~1930)의 자(字)는 경문(敬文)이고 국악에 종사하지 않았다. 역시 자손들도 마찬가지이다. 제적부를 입수하지 못해서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따랐다.
⑤이흥우(1895~1942)는 일본에 유학을 하여 신식 공부를 한 이며 요양을 하기 위해서 철원에 갔다가 거기에서 작고했으며 자손들 역시 국악에 종사하지 않는다.
⑦이덕우(1903~ ?)는 이종하의 막내아들이며 국악에 종사하지 않으며 이의 자손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적부를 입수하지 못해서 족보 기록에 따랐다.
⑧이철우(?~1964)는 이종만의 장자이며 국악에 종사하지 아니 하였고 자손 역시 마찬가지이다. 족보에는 태생 연도가 기록이 없었다.
⑨이영우(?~1969)는 일명 천복(千福)이며 국악에 종사하지 아니 하고 자손 역시 마찬가지이다. 족보에도 태생 연도 기록이 없다.
⑩이춘길(1911~?)은 이종문의 외아들이며 국악에 종사하지 아니 하고 자손 역시 마찬가지이다. 족보에는 작고한 연도가 없다.
이용우는 화성군 동탄면 송라리에서 이종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대는 오산읍 원리(오산시 원동)에서 무려 11대를 터를 잡고 살다가 부친대에서 송탄에서 부산리로 이사를 하여 살기도 하였다. 두루 알다시피 이용우는 이 시대의 마지막 선학습꾼으로 퍽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이인데 이용우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경기도 도당굿에서 볼 수 있는 멋있는 판패개 소리는 더는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용우에 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이 주목을 하였다. 그에 관해서는 문화재관리국의 무형 문화재 조사보고서에 보이는 이력서가 남아있다. 사승 관계 등 본격적으로 이용우에 대한 면모를 다룬 것은 1980년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나온 것과 제적부나 족보 등을 참고하고 또한 유가족이나 제자, 친소 관계있는 이들을 만나서 대담한 것을 바탕으로 이의 생애, 사승 관계, 활동 사항 등을 살펴 보려한다.
이용우의 학습 내력을 보면 아홉 살부터 서모(庶母)인 김해 출신 박금초에게 소리를 배웠다. 박금초는 부친 이종하 보다 두세 살 위라고 하며 판소리를 잘하였다고 하고 열세 살까지 협률사을 따라 다니기도 하며 공연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보형, “ 경기도 도당 굿 ”,『한국민속종합보고서- 무의식 편』, 문화재 관리국, 1983.
부친 이종하가 단체를 이끌고 다니면서 총무나 단체장을 역임하면서 십년을 다니기도 하다가 이 단체가 무슨 단체인지는 구체적으로 몰랐는데 최근에 필자는 <오산재인청> 이라는 소책자를 한국고음반연구회 회원인 배연형 선생한테서 얻을 수가 있었는데 이 소책자는 필사한 것으로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은 이용우 일가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그들의 무의식 입문 과정 등 경기도 산이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閔泳璇 협률회사 (광무 7년; 1903년 5월) 라는 기록이 보인다. 자료를 제공해 주신 배연형 선생께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부산의 초량동 공연시에 해산을 하고 말았다고 한다.
13세부터 15세까지는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을 익히고 이어서 소리목을 다듬기 위해서 부친의 말에 따라서 통도사에 가서 백일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한다. 이보형; 注 20) 참조
이때에 절에서 스님들한테 역학을 배우기도 하고 15세에는 구한말 법무대신 이근호 판사가 광무대를 창설할 당시에 불러서 20세까지 광무대, 단성사 극장에 가서 공연도 하고 멀리는 평양, 함경도까지 다니다가 오산으로 귀향하여 20살 때에 귀향을 하여 일 년간 농사를 짓다가 대금을 만 이년간 독공으로 배웠다한다. 장주근, 「무속」, 『한국민속종합보고서 - 경기도 편』, 문화재관리국, 1978.
장주근이 이용우에 대해서 학습 과정을 밝히기는 하였으나 자세한 내용이 없으며 더구나 전문적인 음악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술된 것이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보형이 그 뒤에 자세한 기록과 연구 논문이 있다.
그러나 이보형이 조사한 보고서에는 대금을 양감면 태생 김부억쇠에게 대풍류와 삼현 한바탕을 배운 바가 있다고 한다. 이보형, 「경기도 - 이용우 편」, 『삼현육각』, 국립 문화재연구소, 1982.
김부억쇠는 이종하와 연배가 비슷한 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1920년도 전후로 생존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되며 이것이 얼추 맞다면 이의 아들인 김기준은 양감면에서 나서 청궁면 용소리에서 살다가 세상을 뜬 김기준이 아닌가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직 알 수가 없다. 김기준은 1960년대 한창 여성 창극단이 창궐했을 적에 창극단에서 대금 반주를 많이 했다고 하며 나중에는 부지거처하다가 세상을 버렸다고 한다. 방인근 대담; 96년. 1월 31일 송파구 오금동 송파 국악 연구실에서. 故 방인근은 십대 후반부터 경기도 산이들과 굿판에서나 창극단에서 연주를 하여 본 녹녹잖은 피리 연주인이었는데 김기준(양감면, 대금), 김창규(천안생, 해금), 김영춘(아산생, 피리) 등 경기, 충남 지역 출신과도 많은 연주를 해 보아서 김기준에 대해서 증언을 해 주었으나 자세한 궤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시나위 학습은 따로 배우지는 않고 이녁이 스스로 가락을 다듬어서 하고 시나위 가락이 고정된 선율이 아니고 국악원 음악처럼 정해진 가락은 없지만 일정한 틀이 있는 것이라서 이것 역시 개개인마다 독특한 가락이 있는데 이에 대한 것은 선학의 연구가 있다.이보형, 「시나위 청」, 『한국음악연구』, 제8-9집 합병호, 한국국악학회, 1979. 32 - 34 쪽
또한 보부상들의 모임인 “하체돌림” 에도 나가서 삼현육각을 반주하기도 하고 이렇게 30세 무렵까지 활동을 하다가 대동 굿이나 집안에서 하는 집굿에도 가서 대금 연주나 판패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장주근, 앞의 注) 참조
또 다른 자료로 이종하(李鍾夏)는 을축생으로 재인청 도육방을 역임하였고 도당 굿의 “선학습꾼”으로 그 이름을 드날리었고 춤의 명인이었다고 하며 민영환(閔泳煥)의 도청직(都廳直)이었다고 한다.
박금초는 경상도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으로 임술생이며 이종하 보다 네 살이 위이며 이용우가 창극단을 따라 다닐 적에는 이동백, 한생전, 정봉민, 조양운 등이 수행했으며 12세에는 부산 草梁에서 해산했기 때문에 귀향을 해서 15세까지 한문과 통감 둘째 권까지 읽고 배웠다한다. 15세에는 서울 이근옥 판사가 장안사를 짓고 창극 단체를 조직하라는 기별이 있어서 경상도 양산 소재 통도사에 가서 백일 공부를 하기도 했다한다. 이보형, 「무의식- 수원 편」, 『한국민속종합보고서』, 문화재청, 1983. 이 기록은 장주근이 쓴 것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데 이보형의 기록은 좀 더 자세하다.
이 기록은 앞의 어느 기록보다도 비교적 정확하며 경기도의 세습 무의식과 민속 음악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왔기 때문에 좋은 기록이 나올 수가 있었다.
이용우가 활동한 시기는 크게 나누어서 일제 시기 초입에 협률사 시기와 귀향해서 대금 학습 시기와 소리 학습 시기, 해방 후에 창극단 시기이다. 창극단 시기는 삼성 국극단과 박보아 단체에서 대금 반주자로서 활동한 시기, 그리고 60년대 중반 무렵부터 70년도 중반까지 서울을 드나들면서 지갑성 일행들과 방송국에 취입한 시기, 70년대 중반부터 80년도 작고할 때까지로 나눌 수가 있다. 일제 시기 초입의 활동에서부터 귀향한 시기까지는 다루었으며 60년대부터 약간 다루어 보면 대강의 면모를 알 수가 있는데 그 당시의 창극단은 자고새면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거듭하다가 지금은 실낱같이 남았지만 이용우가 창극단을 다닐 적에는 이렇게 많은 단체가 생겨서 일일이 기억을 해내지 못했다고 하며 대충 기억을 해서 증언한 것을 보면 박보아, 옥진 자매가 만든 삼성 단체에도 다니고 박후성 단체에도 2년, 한일섭, 남연화 단체와도 다니고 그리고 임춘앵 단체와는 4년간을 다녔는데 단체 가운데 가장 많이 다닌 단체였다고 한다. 창극 단체를 다닐 적에는 소리는 안하고 대금 반주만 하였다고 한다. 장주근, 앞의 글 참조
같이 창극단을 다닌 이들 가운데에는 장유순(피리), 방인근(피리), 오필선(피리, 해금, 대금),이동안(춤), 조만봉(대금) 등이었다.
또한 예전에는 구한말의 세도가의 집이었지만 지금은 한국문화재보호협회가 만든 재단 낙성식에도 참가를 하여 도살풀이 춤 보유자였던 고 김숙자(안성생), 오수복(제98호 경기도 도당 굿 보유자), 고 오막음, 오귀례 등과 예의 꼿꼿한 성품만큼이나 성주풀이를 “그야말로 상중하청을 달아놓고 한바탕 판을 벌인” 적도 있었으며 오수복 대담; 1992. 12. 10. 수원시 권선구 매교동 114-20. 자택에서
지금의 국립극장이 시공관이라고 이름을 붙여 명례방(지금의 명동)에 있다가 남산 언저리에 안목 없는 이들에게 의해서 옮겨졌을 때에도 거기 가서도 군웅 춤을 추기도 하였다.
지갑성 일행과는 한국방송공사에 가서 집굿에서 쓰이는 무속 음악들을 녹음을 하기도 하고 이때에는 주로 이충선(피리), 지갑성(장고), 이용우(대금), 임선문(해금), 전태용(징)이 녹음한 음향 자료도 있으며 이들이 남긴 무속 음향 자료가 21세기로 들어 선 이즈음 이들이 남긴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대금에 김광식(광주생)이 있었으나 이미 1972년도에 세상을 떠버려서 녹음을 못 남겼고 또한 김광식은 주로 무대 공연이나 방송국에 다닌 관계로 이들과는 어울릴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중반에는 경기도에서 있는 도당굿에 참가하여 큰 거리인 손님굿, 군웅 굿, 뒷전에는 어김없이 유장한 사설과 송곳 같이 질르는 상청과 때로는 애원이 깃든 청승스런 목구성을 유감없이 발휘를 하였다.
화성군 반월면 이덕만이 있었지만 육십년대를 거쳐 칠십년대 초까지는 활발하게 활동을 했지만 칠십년도 중반 이후로는 별로 활동이 없어서 이덕만의 소리는 좀처럼 들을 기회가 없었다한다. 오수복 대담; 앞의 주) 참조
1980년대에는 이미 예전에 있었던 단골 제도도 겨우 유지하던 때이고 더구나 도당 굿은 더더욱 없어져 가는 시점이라서 어느 집이나 마을에서 초청을 하면 가서 대금 반주나 녹음을 간간이 해주는 정도였고 더러 오래된 단골집에서 옛 방식대로 굿을 하기도 하였다. 집에서는 경기도의 세습무들이 굿을 해줄 때처럼 판패개 소리도 하고 대금 반주도 하고 장고도 연주하기도 하다가 1987년도에 안타깝게 그 재주를 다하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버렸다.
제자로는 현 경기도 도당 굿 보유자 오수복(1925~ )이 있으며 군웅 춤, 제석 춤을 가르쳤고 한지에 붓으로 장단을 표시한 것을 보고 재학습을 한 고(故) 방인근이 있으며 그 이외는 뚜렷한 제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려 마지막 경기도 선학습꾼의 기가막힌 재주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울 다름이다.
다음은 이용우의 가계도인데 이 가운데에서 국악에 종사한 이도 있을 터이고 안한 이도 있을 터인데 이용우가 아는 이들의 이름과 실제 족보에 기록된 이들과는 이름이나 생몰 연대 또는 계보 순서나 출계, 직계, 방계가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적에 조금은 차이가 날 수가 있을 것이다.
표-4. 이용우의 가계도
①규인─┬─우씨
├──────────┬────────┐
②종하─┬─장씨 ③종만─┼─오씨 ④종문─┼─신씨
┌──┼───┐ ┌─┴─┐ │
⑦덕우 ⑥용우 ⑤흥우 ⑧철우 ⑨영우 ⑩춘길
배연형 소장 필사본 자료 <오산 재인청>과 이용우가 증언한 선대의 이름과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 것은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부득이한 사정임을 감안하기를 바란다. 배연형 소장 <오산 재인청> 에 기록된 이용우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용우→ 종하(부친대)→ 貴仁( 족보에는 奎仁이라고 표기 되어 있다) → 興達 →啓明→ 五福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흥달은 아마도 광달, 규달과 같이 <達>字가 한 行列字로 형제간이며 계명이라는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같은 “계” 字 항렬에선 나온 이인지 아니면 啓河라는 이와는 다른 인물임에는 분명한데 참고로 계명은 헌종대 사람이고 병인생이고 갑인년에 졸하였다고 기록이 있으며 字는 禧星이며 생부는 龍奎이고 형규한테 양자를 갔다고 나오며 이 계명이 맞다면 이종하가 소장하고 있었던 <巫鼓等牌韓自勤吉等狀>에 나오는 이계명과 동일 인물임이 틀림없다.
이종하가 소장하고 있었던 위 문서 중 <右謹言, 漁灘面松蘿里居李啓明卽矣等同類下賤也>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위의 계명과 일치한다. 추엽 융(최길성 역), 「무당의 사회 생활」, 『조선무속의 현지연구』, 계명대 출판부, 1987. 185 쪽.
그리고 이 족보는 이용우가 생전에 만든 것을 다시 종친회에서 개정 증보한 것이며 이용우의 조카딸이 소장을 하고 있다. 가승은 한국전쟁 때에 분실하고 족보만 남아 있다. 관향은 경주이며 상서공파이고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다.
먼저 이용우가 증언한 선대 계보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조부는 규인이며 증조부는 광달(光達) 이용우가 광달이라고 했으나 족보에는 <達榮>이라고 기재 되어 있다.
흔히 우리나라의 족보에는 실제 이름과 족보 표기에서 字, 初名 등이 다르게 기재 된 것을 감안한다면 이용우가 말한 광달은 초명이고 족보명은 달영이라고 보면 된다.
이며 증조부가 삼층 정자관을 쓰고서 촬영한 사진이 있었으며 진사 벼슬을 한 선대가 있어서 홍패 같은 문서들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분실하였고 판소리 명창 이동백의 통정대부라는 명예직도 부친인 종하가 만들어 준 것이다. 삼층 정자관을 쓴 광대는 증조부 밖에는 없다고 증언을 하였는데 흥미로운 것은 팔도 도대방은 대원군이 쥐고 있다가 증조부인 광달이 이어 받고 다시 조부인 규인으로 부친 종하로 이어 받았으며 일제시대에는 “팔도산이” 도조합장(都組合長)을 일본인이 했으며 숙부인 종만이 부조합장을 역임 했다고 한다.
그후에 충청도에서 대방청이 생겨 대방 밑에 부장(副長)격인 도산주(都山主)가 생겼다고 증언을 하였다. 장주근; 앞의 주) 참조
① 이규인(?~?)은 이용우의 조부이며 팔도 도대방을 역임을 했다고 한다. 이규인의 학습에 관해서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없는데 악사였는지 아니면 선학습꾼이었는지 밝혀진 바가 없으나 팔도 도대방을 역임을 하였다하는 것으로 보아서 악사나 선학습꾼이 분명하다. <오산십이차>의 굿 문서는 바로 이 “산이” 집안에서 전해 오기 때문이다. 생몰연대가 족보에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②이종하(1865~1939)는 이용우의 부친이며 이규인에 이어서 팔도 도대방을 역임했으며 도당 굿에서 선학습꾼이었다고 하며 또한 춤의 명인이었고 아들 이용우를 가르쳤다. 부인은 인동 장씨로 병인생이다. 일본제국주의 시절 일본인 추엽 융 일행이 와서 채록한 <오산십이차> 의 무가와 세습무들의 전반적인 자료를 제공한 이가 바로 종하 일가이다. 이종하의 작고한 시기가 불분명한 것은 족보에도 졸년(卒年)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은데 이용우의 제적부에는 한국전쟁 때에 오산읍이 인민군에 의해서 폭격을 당해서 일체의 서류가 불타서 작고한 연도를 알 수가 없으며 겨우 태어난 해를 안 것은 1954년에 다시 작성을 한 제적부와 족보를 통해서였다. 제2차 제보자인 손녀 딸 모모씨(1934~ )가 다섯 살에 이종하가 세상을 떴으니 1939년이라는 작고한 연대가 나온 것이다. 아들 이용우만이 유일하게 국악에 종사를 하고 다른 자손은 종사하지 않았다.
③이종만(1870~?)은 일명 춘만(春萬)이라고도 하며 팔도재인청 부조합장을 역임 하였고 형인 이종하처럼 학습을 한 이는 아니며 재인청에 관여만 하였다고 한다. 작고 연대 역시 족보에도 기록이 안 되어 있는데 이종하 보다는 이삼년 먼저 작고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1936경 쯤 작고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손 가운데 국악에 종한 이는 없다. 작고 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은 한국전쟁 때에 일체의 서류가 불탔기 때문이다.
④이종문(?~1930)의 자(字)는 경문(敬文)이고 국악에 종사하지 않았다. 역시 자손들도 마찬가지이다. 제적부를 입수하지 못해서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따랐다.
⑤이흥우(1895~1942)는 일본에 유학을 하여 신식 공부를 한 이며 요양을 하기 위해서 철원에 갔다가 거기에서 작고했으며 자손들 역시 국악에 종사하지 않는다.
⑦이덕우(1903~ ?)는 이종하의 막내아들이며 국악에 종사하지 않으며 이의 자손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적부를 입수하지 못해서 족보 기록에 따랐다.
⑧이철우(?~1964)는 이종만의 장자이며 국악에 종사하지 아니 하였고 자손 역시 마찬가지이다. 족보에는 태생 연도가 기록이 없었다.
⑨이영우(?~1969)는 일명 천복(千福)이며 국악에 종사하지 아니 하고 자손 역시 마찬가지이다. 족보에도 태생 연도 기록이 없다.
⑩이춘길(1911~?)은 이종문의 외아들이며 국악에 종사하지 아니 하고 자손 역시 마찬가지이다. 족보에는 작고한 연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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