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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극(朴勝極: 19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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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성예총 댓글 0건 조회 2,107회 작성일 : 1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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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극(朴勝極:  1909~  ?  )  
근대시기  수원과  화성지역을  대표하는  사회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  수원지역에  무슨  일만  터지면  일제  경찰은  예비  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운동가들  잡아들였다.  그러한  구금  대상의  첫  손가락에  꼽힌  인물이  그였고,  실제  일제  강점기에  무려  25번이나  구금되었던  인물이다.  
1909년  경기도  수원군(현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에서  7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감면은  당시  수원군에서  가장  작은  면으로  오산과  가깝다.  수원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황구지천으로  바뀌어  안성천과  만나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바로  황구지천의  이름도  정문리와  하천을  마주보고  있는  황구지리에서  나왔다.  이  하천을  경계로  평택군과  화성군이  나뉘는데  이곳  정문리는  그  황구지천의  비옥한  혜택을  받은  축복의  땅이다.  이곳은  평택군  서탄면에  있는  민세  안재홍의  동네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박승극은  정문리  반남  박씨네  마을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로  유학하여  1928년  배재고보를  졸업했다.  그리고  같은  해  일본대학에  진학했으나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온  후  일본으로  가지  않고  자퇴를  하였다.  일본에서는  더  이상  배울게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외모는  늘  우수에  잠겨있었다.  암울한  민족적  현실에  대한  자각과  인식은  이지적인  그로  하여금  허튼  농담을  할  줄  모르는  진지한  사람으로  변모시켰다.    
1920년대는  1919년  3.1운동으로  각성된  청년들로  하여금  독립에  대한  자신감과  새로운  사상으로써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며  조직화되어  갔던  시기다.  우리가  불꽃의  연대로  부르는  1980년대는  여러모로  1920년대와  닮아있지만  역시  1920년대를  뛰어넘지  못한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고  1927년  민족협동전선운동체로서  신간회가  조직되면서  1920년대는  각지에서  열렬한  활동가들을  배출해냈다.  신간회  운동은  전국  각지에  신간회  지회와  분회를  만들면서  청년들의  활동공간을  만들어갔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박승극으로  하여금  일본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식민지  조국에서  보다  확실한  사회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1929년  박승극은  고향에서  신흥학당을  열어  무산청년들을  교양하며  반도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인근의  오산  사-ㄹ청년회  및  광활청년회  등과  연합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신간회  수원지회  총무간사를  역임하면서  수원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다.  또  『朝鮮之光』에  소설  「농민」을  발표하면서  문학을  통한  사회적  발언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그는  청년동맹  및  박팔양․이기영  등이  주도한  조선예술가동맹(KAPE)의  맹원이기도  했다.  
1930년  수원청년동맹  위원장이  되었는데  이  당시  그는  합법운동  공간  창출을  위해  수원읍에  조선일보  지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일제  당국으로  하여금  요주의  인물로  주시하게  되었고  1932년  일제  경찰에  의해  조작된  수진적색농민조합사건으로  검거되어  1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또한  그의  두  동생  박승우와  박승호도  각각  서울  서대문  영천과  고향  양감에서  형  박승극의  영향을  받아  사회운동을  했다.  이러한  박승극의  원칙적이고  확고한  신념은  큰딸의  이름을  돌림  자  앞에  붉을  적을  써서  적서(赤緖)로  지을  정도였다.    
박승극은  고향인  화성을  비롯하여  수원․평택지방에서  조국해방운동과  농민운동에  투신하여  감옥생활도  하였지만  문학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카프  가맹  이듬해인  1929년  『조선지광』  6월호에  일제치하  농민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단편소설  「농민」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1930년대에  쓴  작품「재출발」「풍진」「백골」「술」「눈」등은  그가  농민운동  현장에서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뛰어난  사실성을  얻을  수  있었다.  
박승극은  소설창작과  비평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당대의  임화․김남천의  논쟁에도  참여하여  두  사람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문학평론가로서도  입지를  탄탄히  굳혔다.  「농민문학  진흥론」「농민문학의  신과업」등에서  박승극이  주장한  토지  분배,  토지개혁  등의  이슈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당대  조선문제의  핵심을  토지개혁에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나아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민문학가동맹과  같은  독립된  농민문학  단체를  만들  것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농촌,  농민문제를  주요  계급모순으로  이해하면서  당대  농민의  굶주림,  공출,  징용,  소작인과  지주  계급간의  첨예한  갈등을  작품화하여  1946년  발표한  단편소설「떡」,  1948년의  중편「밥」등에는  해방공간의  현실이  잘  그려져  있다.
해방  후  수원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공산당  수원군당  위원장이  되었다가  1947년  봄  이후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선전부부장이  되어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해방정국의  좌우익  갈등과  미군정의  탄압에  못  이겨  1948년  월북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수원시인민위원장이  되어  수원에  왔다가  이후  인민군의  북상과  함께  이북으로  돌아갔다.  또한  문학적  열정에  비례하는  조국애로  해방공간에서  박승극이  수행한  민주주의  민족전선  경기도  지부  활동  및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상무위원  활동이나  건국준비위원회  수원지부의  핵심적인  활동이  그의  \'뜨거운  문학\'을  지우거나  폄하하는  전제가  된다면,  이는  결국  문학과  역사에  대한  모독이고  폭력이리라.
미군정하에서  건준,  인공의  강제해산과  민전의  불법화는  박승극에게  엄청난  시련이었을  것이다.  그는  1948년  8월  입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며  문화선정성  문학예술  부장,  국립출판사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1960년대까지  창작에  정진했다고  한다.  
이후  개성시당  부위원장  및  청진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였고  1980년대  죽어  평양의  애국열사  묘역에  묻혀있다고  전한다.  남한문학사에서  문학인  박승극이  공식적으로  1988년  복권,  해금되었다.  최근「사람과  땅의  문학」동인들에  의해  「박승극문학전집(전  3권)」중  제  1권  소설집이  학민사에서  발간되어  해방공간의  농민문학의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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